요즘 들어 대학생 때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한 번 읽고 있다. 그때에 잘 이해하지 못했던 문구들이나 사상들이 지금의 나이가 되어서는 새롭게 이해가 되고 읽혀지는 것은 삶의 경험이 그만큼 녹아들어서일까. 그때는 너무 암기 위주로 공부를 하는 훈련이 되어 있어 다면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한층 더 의미있게 다시 4년 동안 제대로 된 공부를 해 볼 수 있을텐데. 그중에서도특히 전공 분야이던 사회과학 분야에서 그렇게 이해가 되지 않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라는 책의 한 부분을 다시 읽으면서 생각하는 바가 있어 여기에 나누고자 한다.
소유가 지배하는 시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민주주의가 싹을 틔우고,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전세계 경제 체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으면서 소유 중심의 사고가 존재론적인 사고를 훨씬 더 앞지르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간관계를 형성할 때도 그 사람 자체의 본질적인 부분 - 첫인상, 성격, 사람 됨됨이 등 – 을 보기보다는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배경 – 직업, 학벌, 지연, 인맥, 가정형편 등 - 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누군가 ‘A라는 사람 어때?’라고 물었을 때, ‘아, 그 사람, 명문대 나와서 지금 대기업 과장으로 연봉도 높고, 집도 강남이야’라고 대답을 한다면 소유론적인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승진자를 정하거나 어떤 일에 적합한 인물을 찾을 때 인간적이고 업무적인 측면에서 적임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인맥이나 학벌 중심으로 선발한다면 그 회사의 인사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역량을 개발하기보다는 아부와 인간관계 라인 만들기에 직원들은 더 몰두하게 될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핵심부서 출신이라고 그 일을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경험적인 믿음은 예상 외의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겠다.
현대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에도 소유론적인 사고가 지배하고 있다. 우리 모두가 소유 중심의 삶과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생산자도 그런 방식에 꼭 맞는 상품들을 팔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도구들이 점점 개발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음원차트 순위나 유튜브 구독자수가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음원이 발표되면 그 음악의 본질이나 독창성, 대중성 등을 평가하기 전에 음원차트 몇 위에 랭크되어 있는지가 더 관심사가 된다. 여기에서 음원사재기의 유혹이 등장하게 된다. 얼마의 대가를 지불하고 음원사재기를 통해 음원차트 상위에 올라가게 된다면 투입된 비용보다 더 많은 수익을 얻게된다. 자본주의적 논리로 본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게 되는 셈이다.
새로운 세대의 커뮤니케이션 창구인 유튜브 채널도 마찬가지이다. 언제부터인지 그 채널이 어떤 콘텐츠를 다루고, 그 내용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평가하기 보다는 그 채널의 구독자수가 몇 명인지, 해당 영상의 조회수와 ‘좋아요’의 수가 얼마인지가 꽤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물론 콘텐츠의 질이 높을 수록 조회수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구독자수도 증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어떤 자극적인 콘텐츠로 구독자수부터 늘리고 보자는 유혹은 이 공평해 보이는 신채널 속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 2편에서는 존재의 의미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나누면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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