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겨야죠. 당신이 만든 미래가 역사가 되면 안 되니까”
노벨평화상을 받은 장일준 대통령에게 박동호 국무총리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달라’고 얘기한 후 대통령의 ‘나를 이길 수 있겠나?’라는 질문에 이어진 대사입니다.
넷플릭스 정치드라마 ‘돌풍’의 기세가 뜨겁습니다. 이 드라마의 시작은 쓰레기로 가득 찬 썩어빠진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개혁파 정치인 박동호 국무총리가 자신의 정치의 아버지이자 정경유착으로 변절한 장일준 대통령을 시해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박동호는 심복인 서정연 비서관에게 ‘이 나라를 살린 거다’, ‘이 방법밖에는 없었다’라고 얘기합니다. 장일준이 만들어 놓은 덫에 의해 구속되기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던 박동호는 자신의 이러한 악한 행위를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자 합니다.
여기서 정의에 대한 오래된 질문이 등장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죄와 벌’이라는 명작을 통해 얘기하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주제 –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제가 ‘죄와 벌’을 읽은 것은 20대 초반이라 상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 최근에 읽은 유시민 작가의 ‘청춘의 독서’에 나온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자 합니다. 유시민 작가는 이 책에서 총 14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죄와 벌’은 당당히도 첫번째로 소개되는 책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전당포 노파인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죽인 행동을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악한 행위라고 정당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전당포 노파는 주변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 꼭 필요한 돈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누지 않고 이복동생인 리자베따를 하녀처럼 부리고 그녀의 돈도 갈취했습니다. 이처럼 알료나는 죽어 마땅한 인물이었고 라스꼴리니꼬프는 실제 그녀를 죽인 후 그녀의 재산으로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악행을 저질렀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살인으로 여러 명의 목숨을 살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돌풍’으로 돌아오면, 박동호가 장일준을 시해한 것 또한 ‘정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초거대기업 ‘대진’과 손을 잡고 아들의 비리를 덮었으며 이를 파헤치고자 한 젊은 의원을 검찰 권력을 이용해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 자신이 성역이 되어 법 위에 군림하고자 했습니다. 박동호는 눈에 가시가 되어 뇌물을 받은 정치인으로 조작될 위기였고, 그는 자신만이 이 썩은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선한 생각에 대통령을 시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도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젊은 시절 ‘죄와 벌’을 읽으며 ‘정의’와 ‘수단’에 대한 생각보다는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지는 죄책감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습니다. 살인 후 그는 끔찍한 정신적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으며 이러한 죄책감이 소설의 대부분에서 생생히 묘사되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아무리 선한 목적도 악한 수단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강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역사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그랬고, 레닌도 그랬습니다. 우리 나라의 전직 대통령들도 그랬습니다. 산업화, 국가안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수많은 지식인들이 간첩으로 빨갱이로 내몰려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독재가 정당화 되고, 공정한 대우에 대한 갈망은 사회 운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돌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잘못 선택한 ‘악한 수단’은 또 다른 악행과 거짓, 정치적 야합으로 이어지고 결국은 자신의 신념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박동호의 정치적 경쟁자인 정수진 또한 권력과 자본의 힘에 넘어 가 젊은 시절 그녀가 척결하고자 했던 자들과 동일한 길을 걸어가게 되며, 심지어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와도 손을 잡게 됩니다.
안타까운 것은 히틀러나 레닌, 그리고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라스꼴리니꼬프가 가졌던 정도의 정신적 번민과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랬더라면 그들이 죽기 전에 진정한 사과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동호가 꿈꾸는 세상이 그러했습니다. “죄 지은 자가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꿈”이라고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 당신의 선택은?
변절한 정수진 부총리가 여전히 꼿꼿한 박동호에게 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과 연결됩니다. 해피엔딩의 드라마나 영화처럼 현실 속에서 진실이 반드시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올리버 스톤이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다룬 영화 ‘JFK’는 짐 개리슨이 목숨을 걸고 수집한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유력한 배후인물 클레이 쇼는 무죄를 선고받으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관객들은 허탈감에 빠지겠지만 영화가 남긴 깊은 여운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제게 선명합니다.
삼국지연의의 간웅 조조는 사소한 오해로 인해 오랜 벗인 여백사 일가를 몰살시킨 후 이를 나무라는 진궁을 향해 ‘내가 세상을 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버리게 하지는 않겠다’라는 명언을 남깁니다. 마이크 샌델 교수는 그의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작전 수행 중 이동 경로에서 염소치기를 만났을 때 그들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들이 적군에게 가서 우리의 위치를 신고하게 되면 미군은 큰 위기를 맞을테고, 만약 그들을 죽였는데 정말 그들이 적군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선량한 시민이었다면 그 죄책감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만약 박동호라면? 라스꼴리니코프라면? 중동전쟁 중인 미군의 지휘자라면? 그리고 여백사 일가를 몰살한 후 여백사를 만난 조조라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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